감이 맞은 날도 도박이었다

감으로 알던 것이 엑셀에서 뒤집힌 적이 여러 번 있다.

규모가 크니 남을 거라고 믿은 계약이 있었다. 매출이 작아서 적자라고 믿은 사업장이 있었다. 사람을 줄이면 돈이 남는다고 믿은 달이 있었다. 셋 다 숫자를 끝까지 넣고 나서야, 혹은 끝까지 넣지 않은 값을 치르고 나서야 틀린 걸 알았다.

이런 이야기는 쓰기 쉽다. 틀린 감과 맞는 계산이 깔끔하게 갈린다.

어려운 건 반대쪽이다.

숫자를 믿는 쪽이다

성향으로 따지면 나는 조사를 더 하는 사람이다. 사람의 느낌보다 숫자를 믿는다. 믿을 만한 통계나 연구가 있으면 거기에 기댄다. 없으면 시뮬레이션을 몇 개 돌려서라도 보고 정하고 싶다.

이유는 단순하다. 감이 틀리면 어디서 틀렸는지 찾아갈 길이 없다. 숫자가 틀리면 어느 칸이 틀렸는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틀린 걸 고칠 수 있는 쪽을 믿는다.

회사는 그 속도로 굴러가지 않는다.

정하고, 가면서 고친다

결정은 대부분 자료가 다 모이기 전에 온다. 오늘 답해야 하는 일이 있고, 일주일을 조사하는 사이 조건이 바뀌는 일이 있다. 그러면 정하고, 가면서 고친다.

좋아서 고른 방식이 아니다. 시간이 고른다.

숫자를 믿는 사람이 숫자 없이 정해야 하는 날이 자주 온다. 결정 하나하나가 무거운 게 아니다. 확인하지 못한 채 넘긴 것들이 머릿속 한쪽에 계속 열려 있다. 닫지 못한 파일이 하나씩 쌓인다.

좋아하지 않는 방식으로 자주 일해야 한다는 것. 피로는 결정의 무게보다 거기서 온다.

감이 맞은 날

감으로 정한 일이 잘 풀리는 날도 있다.

이런 날은 감이 좋았다고 정리하기 쉽다. 나는 그 결정을 감이 맞은 결정 칸에 적지 않는다.

데이터 없이 들어간 결정은 결과가 좋아도 도박이다. 판을 땄다고 도박이 아니게 되지는 않는다. 딴 방식 그대로 다음 판에 걸면 언젠가는 잃는 판이 오고, 그게 언제인지는 감이 알려주지 않는다.

딴 판이 잃은 판보다 위험한 이유도 거기 있다. 잃은 판은 적어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든다. 딴 판은 같은 방식을 한 번 더 쓰게 만든다.

맞았다는 사실이 가리는 것도 있다. 숫자를 보고 정했다면 더 잘 풀렸을 수 있다. 얼마나 더였는지는 모른다. 잘 풀린 결정은 다시 열어보는 사람이 없어서다.

감 옆에 숫자 하나

감을 버릴 수는 없다. 시간이 없는 날은 계속 온다.

처음에 적은 세 번을 나란히 놓으면 감이 틀린 자리가 비슷하다. 감은 눈에 보이는 줄로 판단했다. 틀린 건 매번 장부에 칸이 없던 비용이었다. 주말에 붙은 인건비, 아무도 열어보지 않은 지출, 사람이 나간 뒤에 온 청구서.

그래서 숫자를 다 넣을 시간이 없는 날에도 질문 하나는 넣을 수 있다. 이 결정에서 장부에 안 잡히는 건 무엇인가.

그다음은 감과 결정 사이에 숫자를 하나라도 끼워 넣는 일이다. 자료를 모으는 시간이 줄면, 감으로만 정하던 일 가운데 몇 개는 숫자를 보고 정할 수 있다. 요즘은 자료 모으는 일을 AI에게 먼저 맡긴다. 정하는 건 여전히 내 몫이지만, 빈손으로 정하는 날은 줄었다.

감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감 옆에 무언가를 놓고 정하는 날이 늘었다.

결과가 가려주지 않는 것

오늘도 몇 개는 감으로 정했다.

그중 무엇이 판단이었고 무엇이 운이었는지는 결과가 나와도 갈리지 않는다. 잘 풀리면 둘 다 판단처럼 보이고, 틀어지면 둘 다 운 탓처럼 보인다.

내일도 몇 개는 감으로 정한다. 그 판이 도박이라는 걸 알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