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을 줄이는 건 대출이었다
회사 돈을 빌릴 때는 금리부터 본다.
얼마를 빌리는지보다 얼마에 빌리는지가 먼저다. 언제부터 얼마씩 갚는지, 갚는 동안 무엇이 묶이는지. 그걸 다 확인한 뒤에 도장을 찍는다. 금리가 조금만 달라도 몇 년치를 더하면 차이가 커진다. 회사 자금을 직접 챙기는 사람의 버릇이다.
매일 빌리면서 금리를 한 번도 안 본 것이 하나 있다.
밤에 빌린다
아이들이 잠들면 노트북을 연다. 한두 시간이 보통이고, 일이 몰리는 주에는 새벽까지 간다.
낮에는 한 가지에 오래 붙어 있을 수가 없다. 깊이 파야 하는 일은 밤으로 밀린다.
넘겨도 되는 걸 못 넘기는 성격도 한몫한다. 마감은 맞췄는데 디테일이 덜 채워졌으면, 그 빈칸을 채우는 시간도 밤에서 나온다.
그 시간은 어디서 오는가. 하루에 따로 생기는 시간은 없다. 잠에서 당겨 온다.
빌린다는 생각은 없었다. 낮에 못 한 일을 밤에 한다고만 여겼다. 시간을 새로 만든 줄 알았는데, 옮겨 온 것이었다.
금리가 올랐다
서른 초반까지는 이 대출이 쌌다.
그때는 밤에 머리가 제일 잘 돌았다. 빌린 시간이 제값을 했다.
지금은 반대다. 밤에는 집중이 잘 안 되고, 아침이 제일 맑다. 같은 한 시간을 빌려도 밤에 쓰는 한 시간은 예전만큼 일을 하지 못한다.
갚는 쪽은 하필 아침이다. 하루 중 가장 잘 돌아가는 시간이 전날 밤 빌린 잠을 갚는 데 쓰인다. 잠이 모자란 오전에는 집중이 흐리다. 이자는 오전에서 끝나지 않고 하루 전체에 나눠 붙는다. 회의에도, 결재에도, 저녁 식탁에도.
대출은 표에 적힌 금리가 아니라 실제로 치르는 값으로 비교한다. 수수료와 묶이는 담보까지 넣어야 진짜 금리가 나온다. 잠에 같은 계산을 대면 답이 나쁘다. 밤의 한 시간이 아침의 한 시간만큼 일을 한다면 본전이다. 지금 내 밤은 아침만큼 일을 못 한다. 싼 시간을 빌리고 비싼 시간으로 갚는다.
회사 대출이 이런 조건이었으면 나는 서명하지 않았다.
몰아서 갚는다
갚는 방법을 모르는 건 아니다.
크게 지치면 잠을 몰아서 잔다. 푹 자고 나면 풀린다. 내가 아는 회복법 중 제일 확실한 게 잠이다. 그걸 알면서 제일 먼저 줄이는 것도 잠이다.
줄이기 쉬운 이유가 있다. 잠은 청구서가 바로 오지 않는다. 오늘 밤 한 시간을 빼도 내일 아침에 누가 따지러 오지 않는다. 회의에 빠지면 사람이 기다리고, 아이와 한 약속을 어기면 아이가 기억한다. 잠은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그래서 늘 맨 먼저 밀린다.
몰아서 갚는 방식은 계산이 안 맞는다. 빌리는 건 매일인데 갚는 건 가끔이다. 한 번 길게 자는 날은 원금을 갚는 날이 아니라 밀린 이자를 내는 날에 가깝다.
연체
건강에도, 마음에도 부담이 쌓이고 있다는 걸 안다. 고쳐야 한다는 것도 안다. 아는 것과 줄이는 것 사이가 멀다.
회사 장부였다면 이쯤에서 경고등을 켰다. 이자가 원금을 따라잡는 구간이다. 회사 자금의 경고등은 내가 본다. 내 잠의 경고등은 보는 사람이 없다.
상환일이 없다
갚는 날짜를 정하지 않은 빚은 줄지 않는다. 회사 장부에서는 당연한 이야기다.
회사 빚에는 상환 일정표가 있어서 줄어드는 게 눈에 보인다. 잠에는 표가 없어서 늘어나는 것도 안 보인다.
내 잠에는 그 날짜가 아직 없다. 날짜 없는 대출이 오늘 밤에도 한 건 늘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