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안 한 날처럼 느껴지는 날
밤에 노트를 열고 오늘 한 일을 적으려다 멈췄다.
회의 둘, 전화 몇 통, 결재 몇 건. 적고 나니 더 적을 게 없다. 새로 시작한 것도 없고 끝낸 것도 없다. 아침에 본 잔고와 밤에 본 잔고가 같다.
이런 날이 이번 달에만 여러 번이다. 하루가 다 갔는데 손에 쥔 게 없다.
그대로는 공짜가 아니다
그런 날을 한동안 손해로 쳤다.
한번은 거꾸로 세어봤다. 오늘 일어나지 않은 일을 적어봤다. 아무도 그만두지 않았고, 나가야 할 돈이 날짜에 나갔고, 나가야 할 물량이 나갔고, 사고가 안 났다.
적자를 내는 회사에서 어제와 같은 자리에 있는 건 저절로 되지 않는다. 손을 놓으면 그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내려간다. 같은 자리에 있으려면 누군가 하루를 통째로 붙잡고 있어야 하고, 오늘은 그게 나였다.
그날 한 회의 둘은 안 했으면 다음 주에 일이 됐을 것들이다. 전화 몇 통은 걸지 않았으면 한 달 뒤에 서로 다르게 기억하고 있었을 것들이다. 안 일어난 일에는 이름이 없어서, 적으려고 하면 쓸 말이 없다.
성장한 날만 세면
기록을 그렇게 해왔다. 새로 딴 계약, 줄인 비용, 만들어낸 것. 셀 수 있는 것만 적었다.
셀 수 있는 것만 적는 버릇은 회사 숫자를 보다가 옮아왔다. 들어온 돈은 세고, 안 빠져나간 돈은 안 센다. 장부는 원래 그렇게 만들게 돼 있다. 그 방식으로 하루를 결산하면 지킨 것이 통째로 빠진 장부가 나온다.
그렇게 적으면 달력의 대부분이 빈칸이 된다. 열흘 중 여드레가 아무것도 아닌 날로 남는다. 그 여드레에도 회사는 돌아갔는데 내 기록에는 안 적혀 있다.
빈칸이 길어지면 사람은 자기가 논 줄 안다. 놀지 않았는데 놀았다고 생각하면 다음 날 무리한다. 밤에 뭐라도 하나 더 하려고 책상에 다시 앉는 날이 그렇게 생긴다. 다음 날 아침에 집중이 안 되는 것도 그 다음이다.
큰 날은 자주 오지 않는다
크게 움직이는 날은 일 년에 몇 번 없다.
계약이 하나 들어오는 날, 자금이 도는 날, 오래 준비한 게 끝나는 날. 그런 날을 기준으로 삼으면 나머지 삼백 며칠은 기준 미달이다. 삼백 며칠짜리 실패를 매일 자기한테 통보하면서 그 몇 번을 기다리는 셈이 된다.
그리고 그 몇 번은 버틴 날들 위에서만 온다. 회사가 그때까지 남아 있어야 오는 것이다. 남아 있게 하는 일은 기록할 게 없는 쪽에 전부 들어가 있다.
주변에 비슷한 사람들이 있다. 혼자 다 붙잡고 있는 사람들. 만나서 이야기해 보면 대체로 요즘 아무것도 못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 사람이 지난달에 뭘 했는지는 내가 알고 있다. 자기 것만 안 보인다.
한 칸을 더 만들었다
노트에 칸을 하나 더 뒀다. 위 칸은 오늘 한 일, 아래 칸은 오늘 지킨 것.
거창하게 적지는 않는다. 급여 날짜, 나간 물량, 오늘 아무도 그만두지 않았다는 것. 한 줄씩이다.
아래 칸은 매일 채워진다. 어떤 날은 두 칸 다 채워지고, 대부분의 날은 아래 칸만 채워진다.
아래 칸만 채워진 날에 뭐라고 적어야 하는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그냥 오늘도 버텼다고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