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 수 있는 판의 크기는 통장이 정하지 않았다

사업을 하면 얼마까지 걸 수 있느냐를 자주 계산하게 된다.

한동안 그 답이 통장에 있다고 생각했다. 여유가 이만큼이니 여기까지는 걸 수 있다, 하는 식으로.

아니었다.

식구 수가 정한다

밤에 자금 계획을 붙들고 있으면 어느 순간 계산이 회사에서 집으로 넘어간다.

이 결정이 잘못되면 회사가 어디까지 밀리는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러면 다음 달 카드값은 어떻게 되는가. 아이 셋의 다음 학기는 어떻게 되는가.

같은 금액인데 무게가 다르다. 혼자였다면 걸었을 판을 안 걸게 된다. 그리고 그 결정을 내가 신중해서 내렸다고 적어둔다. 신중해서가 아니라 무서워서인 날도 있다.

자금이 빠듯한 달에는 잠이 잘 안 온다. 다른 사람은 같은 숫자를 보고도 잘 자는 것 같은데 나는 안 된다. 겁이 많아서라기보다, 그 숫자가 회사 장부에서 끝나지 않고 집 식탁까지 이어져 있다는 걸 계산이 끝나기 전에 이미 알고 있어서다.

그게 나를 지켰다

지킨 것도 사실이다.

회복 못 할 자리까지 밀고 들어간 적은 없었다. 자금이 마르면 회사만 마르는 게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마지막 한 칸은 늘 남겨두고 계산했다. 그 한 칸이 몇 번 회사를 살렸다.

그리고 나를 늦췄다

같은 성향이 반대로도 작동했다.

되돌릴 수 없는 결정 앞에서 신중한 것은 맞는 태도다. 문제는 그 신중함이 되돌릴 수 있는 결정에까지 그대로 붙는다는 것이다. 판이 커 보이면 크기부터 재고, 재다가 시간이 간다.

재는 동안 판이 가만히 있어주지도 않는다. 조건은 조금씩 나빠지고, 나빠진 조건은 다시 결정을 어렵게 만든다. 미룬 값은 청구서로 오지 않아서 미룬 줄도 모르고 지나간다.

크게 후회한 결정 두 개를 나중에 적어봤다. 둘 다 방향이 틀린 게 아니었다. 시점이 늦었다. 같은 결정을 다시 하라고 해도 나는 똑같이 하겠다. 다만 더 빨리 했을 것이다.

늦은 이유는 대체로 하나였다. 여기까지 들인 게 아까워서. 그 아까움 뒤에 있던 건 겁이었고, 겁의 이름은 부양이었다.

둘로 갈라놓는다

요즘은 결정을 앞에 두면 먼저 하나를 묻는다.

이건 되돌릴 수 있는가. 되돌린다면 얼마가 드는가.

되돌리는 값이 작으면 오래 붙잡지 않는다. 틀리면 되돌리면 된다. 되돌리는 값이 크면 그때는 며칠이든 붙잡는다. 대부분의 결정은 앞쪽인데, 나는 오래 뒤쪽처럼 다뤘다.

큰 건은 시작하기 전에 접는 선을 숫자로 적어둔다. 여기까지 밀리면 접는다고 미리 정해두면, 그 순간이 왔을 때 판단이 아니라 확인만 하면 된다. 한창일 때의 나보다 시작할 때의 내가 더 냉정하다는 걸 이제는 인정한다.

이미 써버린 돈은 이 계산에 넣지 않는다. 넣기 시작하면 답이 항상 “조금만 더”로 나온다. 그 답에 두 번 속았다.

남는 것

아이들은 내가 무슨 결정을 하는지 모른다. 알 필요도 없다.

다만 늦게까지 불을 켜놓고 앉아 있는 날이면, 이 계산의 절반은 회사 것이 아니라는 걸 안다.

부양이 겁을 만들고 겁이 결정을 늦춘다는 걸 알게 된 뒤로도 그 무게가 가벼워지지는 않았다. 무게는 그대로 두고 계산하는 법만 바꿨다.

그 정도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이다.